손양원 목사의 생애와 신앙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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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배경과 소명>
。 1902년 6월 3일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에서 손종일 장로와 김은수 집사의 장남으로 출생
。 1908년 부천의 입신과 함께 7세에 입신, 1914년 3월 17일에 학습, 1907년 10월 3일에 맹호은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 192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에 있는 스카모 중학 야간부에 입학, 신문 배달을 하면서 학업을 계속함
1923년 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그 해 10월 칠원읍 교회 집사로 파견, 1924년 1월 정양순(정쾌조)씨와 결혼
。 1929년 3월 경남 성경 학교를 졸업한 후 1934년까지 월산 방이진 교회를 비롯하여, 남창교회, 양산교회, 부산 감안 나병원 교회, 남부원 교회, 원동교회 등의 여러 교회에서 전도사업에 열중
<수난의 예고>
。 신사참배
a. 신앙의 문제는 항상 그 시대에 따라 여러 각도로 해석, 그 시대마다 그 상황에 맞는 내용들이 등장하여 한 시대의 모습을 보여줌
b. 당시 교계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었고, 급기야 신사 참배는 하나님을 향한 범죄 행위가 아니라고 하는 무서운 결의를 하게 되는 죄를 저지름
<격리된 땅 애양원을 향하여>
。 경남 노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한 총회의 결의를 받아들여 신사참배를 솔선 이행하기로 결정함
。 애양원 교회에 부임 - 원가리 목사에게 손 목사를 소개
。 애양원에 와서도 설교 때마다 강단에서 신사참배의 부당성 공격
<소외된 자들의 다정한 친구>
。 애양원 한센병 환자 수용소는 미국 남장로 교회 선교회의 전도 사업의 일부분으로 1909년 광주 양림에서 시작한 것이 1925년 이곳으로 이전, 9명으로 시작한 것이 손양원 목사가 맡아 할 때는 약 천명 이상을 수용
<두 아들을 먼저 보낸 아픔의 순간>
。 여수, 순천 사건 - 여수 시내의 경찰서와 각 파출소, 군청, 역 등 주요기관이 모두 소요를 일으킨 군인들의 수중에 들어감, 순천도 점령
。 학교의 프락치들은 가장 먼저 그들을 색출하여 체포, 형제는 인민 제판에 회부
。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장본인들 중에 안___이라는 학생도 체포
a. 나의 죽은 아들들은 결코 자기들 때문에 친구가 죽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만일 이 아이를 죽인다면 그것은 동인 형제의 죽음을 값없이 만드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 학생의 석방을 간청
b. 그의 간청이 받아들여지게 되어Tr, 손양원 목사는 후에 그 학생을 손___이라 하여 자신의 양아들로 삼음
<길이 남을 고귀한 정신>
。 6.25 동란 - 한강을 넘어 수원을 점령하고 대전을 빼앗고 대구로 진격, 일부는 호남으로 진격하여 호남 일대로 점령
。 자신의 생명보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무리들을 더 먼저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아름다운 본으로서 사람들의 마음에 간직될 것
。 1950년 9월 13일 - 적도에게 체포되어 그로부터 보름 후인 9월 18일 11시 여수 근교 미평이란 곳에서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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