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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물 들어봤니]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William M. Baird)

페이지 정보

작성자 강눈물 댓글 0건 조회 533회 작성일 20-04-27 14:26

본문

오늘 '이런 인물 들어봤니' 코너에서 만나볼 신앙의 선배님은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 선교사입니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은 복음전도 활동과 더불어 기독교 문서의 간행에도 힘을 쏟았다. 성경번역, 찬송가와 사전의 편찬, 기독교 신문의 발간, 학교 교육과 관련된 교과서 편찬,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해설과 기독교 변증을 위한 문서사업은 시급한 과제였다. 이런 현실적 요구에 따라 출판사를 세워 전도문서와 서적, 교재, 사전을 출판했다.

베어드도 문서선교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내한 초기부터 전도용 소책자들을 출간했고, 평양 숭실학당에서는 부인 애니 베어드(한국명 안애리)의 도움을 받아 학생들을 위한 교재를 번역, 출간했다. ‘대학 문제’의 여파로 1916년 숭실학당의 교장직을 사임한 후에는 1931년 별세하기까지 문서선교 사역에 전념했다.


한국 사랑 남달랐던 애니 베어드

숭실학당 초창기에 학당의 안정과 발전에는 애니 베어드 선교사의 공헌이 컸다. 애니는 중등교육을 위한 교재가 없을 때 미국 교과서들을 들여와 한국어로 번역하고 이를 편찬했다. 그녀는 동물학 식물학 물리학 등 자연과학 교재도 출판했다. 1906년 순한글로 편역한 ‘식물도셜’은 우리나라 최초의 식물학 서적이었다. 애니는 한국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쉽게 배우도록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50가지 도움들’이란 책자도 발간했다. 한국을 알리기 위해 뉴욕에서 영어로 ‘한국의 새벽: 극동에서의 한 회심에 대한 이야기’도 출간했다.

이 소설은 한국의 전통 가정에서 자란 한 소녀가 선교사에 의해 예수를 믿고 변화된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풀어내고 있다. 1913년 발행한 ‘선교생활의 내면의 모습’은 자신의 선교사 경험을 토대로 쓴 글로 그녀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종교적 영성,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는 창작가의 길을 가려던 그녀의 재능이 잘 드러나 있다. 1911년 예수교서회에서 ‘고영규전’과 ‘부부의 모본’을 출간했다. ‘고영규전’은 주인공이 예수를 믿고 변화돼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삶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부부의 모본’은 크리스천 부부의 사랑이 가득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애니의 공헌에는 미국 찬송가의 한국어 번역과 편집을 빼놓을 수 없다. 그녀가 작시한 찬송가 387장 ‘멀리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는 구한말 국권의 상실로 절망과 암울함에 싸여 있던 한국인들에게 위안과 소망이 됐다. 이 찬송은 시어가 간결하고 아름다우면서도 시인의 시적 영감과 깊은 영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창작 시이다.

이 밖에도 그녀는 어린이와 어른들을 위한 찬송가를 많이 번역해 당시 교회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을 사랑했던 애니는 오랜 기간 선교활동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바쁜 선교사 생활 속에서 안타깝게 1908년 암이 발병했던 것이다.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았으나 재발하자, 가족과 친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픈 몸으로 한국에 돌아와 1916년 6월 9일 5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 곁에서 하나님 나라로 떠났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은 죽을 때는 고향에 묻히기를 소망하는 한국인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애니의 장례식에는 그녀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표현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온 조문객들로 넘쳐났다.


베어드, 조선의 흙이 돼다

베어드는 대학문제의 여파로 1916년 3월 31일 숭실대학 교장직을 사임한 뒤 사역 후반부에는 기독교서회 편집위원,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 등을 역임하며 문서 사업에 힘썼다. 베어드는 1918년 안식년 기간 중 로즈 베어드(한국명 배로사)와 두 번째 결혼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저술과 번역, 성경공부 교재 번역과 편찬, 성경해설을 포함한 각종 논설을 집필했다.

이 시기 베어드의 작품은 대략 15종의 저술과 20여종의 역서, 20여편의 영문 논설, 그리고 편집인으로 있던 ‘신학지남’에 기고한 36편의 글 등이다. 베어드는 특히 신학지남 편집인으로 활동하면서 문서사역에 심혈을 기울였다. 신학지남은 장로교회의 첫 신학지로, 감리교의 ‘신학세계’가 창간된 지 2년 후인 1918년 3월 20일 창간됐다. 베어드는 1921∼1927년 6년간 편집인으로 일했다.

이상의 작품들을 분류하면 첫째 ‘사복음대지’ 등 성경연구와 관련된 저술과 번역서, 둘째 ‘쟝자로인론’ 등 전도문서나 기독교 변증 관련 저술과 번역서, 셋째 ‘신행록’ 등 신앙생활에 관한 안내서, 넷째 ‘주재림론’ 등 기독교 교리와 관련된 저술 등이었다.

한편 베어드는 1911년부터 성경번역위원회 구약개역자회의 개역위원으로 참여해 구약성경을 번역했고, 1920년부터는 성서공회 성서출판위원으로서 성서번역에도 중요한 공헌을 했다. 베어드는 1925년부터 1926년 휴가 기간 동안 미국 시카고대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히브리어를 공부한 후 귀국해 개역자회 평양지부의 성경번역 작업을 주도했는데, 1925년 창세기, 1926년 출애굽기와 레위기를 완료했고, 1930년에는 17권의 구약성경 개역본을 완성했다.

그 후 베어드는 1931년 11월 28일 사망함으로써 더 이상 개역작업에 동참하지 못했지만 1936년 개역 구약전서가 출간되는 일에 기여했다. 베어드의 문서선교 사역은 한국장로교회의 신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숭실대학 한국인 교수 김인준의 도움을 받아 펴낸 기독교 신앙서적과 교리서적들은 한국교회가 보수적 정통주의 신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한국교회를 위해 헌신했던 베어드는 1931년 선교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3개월 후 장티푸스가 발병해 그해 11월 28일 별세했다. 향년 69세였다. 장례식은 평생 친구인 마포삼열을 위원장으로 학교와 교회 연합장으로 치러졌다. 마포삼열, 언더우드 등 조선에서 활약한 선교사 대부분이 본국에 귀국해 일생을 마쳤지만 베어드는 조선인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평양 교외의 선교사 무덤인 장산묘지에 매장돼 조선의 흙이 됐다.

글 : 김명배 교수(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주임교수)

[글*사진 출처] - 국민일보
[원본링크]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508563&code=23111117&cp=n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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